본문 바로가기
문학

푸코의 판옵티콘과 신자유주의적 시간에 대해

by Ariad 2023. 4. 14.
반응형

아름다운 산의 이미지
푸코의 판옵티콘과 신자유주의적 시간에 대해

 

푸코의 판옵티콘

 

판옵티콘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비롯되었다.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의 'opticon'이 합쳐진 것이다. 이 단어를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이다. 그는 이러한 이름을 지닌 교도서의 형태를 제안했다. 

 

판옵티콘은 교도소의 중심에 위치한 감시자들이 외곽에 위치한 수감자들을 감시하지만, 수감자들은 감시자들의 위치와 중심을 알 수 없도록 설계되었다. 이때문에 죄수들은 감시자들이 자신들을 감시하지 않는 순간까지 감시 당한다는 느낌에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푸코가 이 개념을 철학적으로 끌고 온 것은 <감시와 처벌>에서 현대의 컴퓨터 통신망과 데이터 베이스가 이와 같은 '판옵티콘'처럼 개인을 감시하고 통제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각종 전자 개인 정보 등이 권력 기관에 쉽게 활용되는 구조가 되었고, 이를 통한 통제도 쉬워졌다. 

 

산의 이미지
푸코의 판옵티콘과 신자유주의적 시간에 대해

 

신자유주의적 시간

 

시간은 물리적 실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시간을 의식하고 산다. 어떤 순간에 애정을 갖고 몰입하면 우리는 시간을 잊고 살지만, 속도와 경쟁이 중요해진 신자유주의 시대의 사람들은 시간을 너무나 의식하고 산다. 그만큼 순간에 애정을 갖고 몰입하기가 힘든 세상인 것이다. 속도와 경쟁이 중요해진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과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착취한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헛되게 보내면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게 될까봐 늘 초조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판옵티콘 감옥에 갇힌 죄수들처럼 스스로가 자신의 감독관이 되고 스스로를 착취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이러한 성과주체는 부정성이 결여된 채 끝없는 과잉의 포로가 되어 쉼을 모르고 자신을 계속해서 가동한다고 설명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휴학을 하거나 계획 없이 삶을 사는 건 시간낭비에 불과한 무모한 짓이 되어 버렸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 아래서 사람들은 항상 피곤하다. 무용지물이 된 자신의 모습을 꿈꿀 수 없는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러한 현상은 사회 시스템에 잘 편입된 사람들에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거 같다. 사회 시스템에 비교적 잘 적응한 명문대생일수록 항상 분주하고 바쁘다. 일차적으로 사회에 잘 적응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탈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거 같고, 남들이 하는 만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거 같다. 그래서 항상 비워진 시간을 채우려 하고, 그만큼 시간 낭비를 싫어한다. 오히려 사회적인 시선에서 바라볼 때 체제에 잘 편입하지 못한 사람들이 시간을 넉넉하고 풍요롭게 누리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그만큼 그들은 사회가 말하는 명예나 부는 얻지 못하겠지만,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비롯되는 고충도 있겠지만, 적어도 시간을 '인간적'으로 누리는 것은 그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다고 그러한 삶이 신자유주의적 시간에 대한 대안으로 보기는 어려운 거 같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는 그러한 널널한 삶을 쉽게 용인하는 관대한 사회는 아닌 거 같다. 하지만 적어도 사회가 말하는 '시간 낭비'라는 것에 대한 개개인의 가치의 전환, 인식의 전환은 필요한 거 같다.

 

철학의 필요

 

우리 사회에 스며들어 있는 시스템을 알고, 내가 그 시스템 속에 있으며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인 거 같다. 그렇다면 시간낭비가 과연 진짜 시간낭비인가, 효율성을 위해 얼마나 더 경쟁해야하는가 등등의 새로운 물음이 생길 거 같다. 답은 쉽게 나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그러한 의문을 품는 것부터 사회가 강요한 가치로부터 한발 떨어져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 같다. 그렇다면 '시간 낭비'한 자신에 대한 죄책감도 조금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시스템은 개인이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죄책감, 편입되지 못할 것에 대한 불안, 두려움으로 공고히 유지되는 거 같다.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작은 인식의 변화와 실천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길은 분명 있을 거 같다. 시스템을 인식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래서 내가 그 시스템 안에서 일상생활을 어떻게 비틀어갈 것인가도 고민해야 하는 거 같다. 그러한 가치의 전환, 인식의 전환의 계기로 철학이 필요하다.

반응형

댓글